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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api/v1/

어떤 스타트업 대표가 쓴 글과 그 글에 대한 소감을 남기려고 한다. 그 글은 글쓴이 본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자신과 일을 하기 위한 일종의 규약을 나열한 자기소개서였다. 제목은 "John API v1",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떤 매체를 통해 연락하는 것을 선호하는 지, 주요 업무 시간이 어떻게 되는 지, 그리고 성격유형검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나와있었다. 크게 MBTI와 DiSC 진단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동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람과 '잘' 일하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아껴 줄 수 있었다. 동료들을 위한 '나' 사용설명서인 셈이다. 그 스타트업 대표는 개발자 출신이다보니 더 재미있는 표현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 뒤에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버전 1이라는 프로그래밍 용어를 붙여서 문서 제목을 지었다. 개발자들이라면 살며시 미소지을만한 재치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John API v1"을 보기 대략 8년 전 쯤, 삼성전자 입사 후 첫 내부 세미나[각주:1]를 했을 때 John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발표 자료를 준비했는데, 당시 발표자료 첫 장에 자기소개를 넣었다. 소개 장표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일부 내용은 제외했다.

시작하기 전에
  Wiki
  Coffee & Beer

위키(Wiki)는 문서와 공유를 중심으로 협업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커피와 맥주는 차를 마시거나 치맥을 하면서 지식교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프로그래밍은 책상 앞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로그래밍은 사람이 사용할 도구를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사람이 뭘 원하는 지 알 수 있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 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고기 맛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는 속담처럼 사람을 겪어봐야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각주:2] 또한 고생한 동료들과 맥주 한 잔 함께 하면서 공동의 결과물을 함께 기뻐하는 것만큼 엔지니어(Engineer)로서 기쁜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참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시절에 내가 왜 저런 글을 썼는 지 의도를 잘 기억하고 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를 만든다는 것은 협업하기 위해 먼저 악수를 청하는 행위 였다. 그래서 John이 동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우연히 발견하였을 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환희와 희열의 감정을 느꼈다. 물론 John의 문서와 내용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협업을 위해 동료에게 자신을 소개하려는 의도는 같았다. 자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그리고 타인과의 오해를 줄이고 싶다면, "iam/api/v1/"을 작성해 보길 추천한다.


 

  1. 기술적 이해 수준과 발표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신고식 같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2. 인문학을 잘 아는 개발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경영학과 출신을 뽑아서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인문계열 출신들을 대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채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본문으로]